잔설이 채 녹지 않은 이른봄에 차갑게 얼어붙은 땅을 비집고 올라와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바람꽃'입니다. 바람꽃은 그 종류도 다양하며 생김새도 각양각색입니다. 또한 그 이름이 지닌 느낌처럼 꽃 전체가 바람을 따라 흔들릴 정도로 작고 여리며, 바람처럼 일찍 피었다 바람처럼 빨리 사라집니다.
봄에 피는 대부분의 꽃들이 여성스럽긴 하지만, 이 바람꽃 종류들이야말로 가장 여성스럽고 한국적인 고운 미(美)와 성품을 가득 지닌 꽃이라고 장담을 하고 싶습니다. 이유인즉 외적으로는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겨움과 순박한 미를 갖추었고, 내적으로는 차가운 땅을 뚫고 나오는 강한 생명의 기운을 품고 있기 때문이죠.
야생 산지 봄꽃들의 태동은 바람꽃 무리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전북 변산반도에서 처음 발견되어 학명 또한 발견지 이름을 따른 '변산바람꽃(Eranthis byunsanensis B.Y. Sun)'이 2월 중순 하얀 꽃망울을 피우면, 그 해의 봄이 시작됨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경기도 지역에서는 이와 특징이 가장 유사한 ' 너도바람꽃'이 2월 하순부터 경기도 지역 산지 곳곳에서 활짝 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 강원 지역의 산지에서는 '홀아비바람꽃'이 봄의 전령사 노릇을 합니다.
봄을 예비하는 여러 종류의 바람꽃들은 각기 조금씩 특성을 달리하지만 공통적으로 키가 모두 작으면서 꽃색이 희며, 1개 또는 아주 적은 수의 꽃이 줄기 끝에 달려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이들은 모두 다른 식물의 잎이 돋기 전에 꽃을 피우기 때문에 주변의 영향으로 좋은 사진을 얻기가 힘듭니다. 일반적으로 꽃 사진은 주변이 녹색일 때 가장 예쁘게 찍히는 법인데, 바람꽃이 꽃망울을 피우는 시간은 눈의 흔적이 남아 있는 '흰색'이거나 초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갈색'의 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봄이 점차 깊어가면서 산지에는 숲바람꽃, 회리바람꽃, 세바람꽃, 나도바람꽃, 쌍동이바람꽃들이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한여름에 다다르면 키가 크고 가지들이 많이 뻗어나 꽃망울 또한 많은 바람꽃을 강원도 일대의 높은 산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봄의 시간 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경기도 일원에서 볼 수 있는 바람꽃은 앞서 언급한 '너도바람꽃'을 비롯해 '꿩의바람꽃', '만주바람꽃'들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경기도 서해 일원에서 '변산바람꽃' 군락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바람꽃 종류들의 속명(屬名)은 ‘아네모네’(Anemone)인데, 이 속명을 얻은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옛날 꽃의 신 ‘플로라’에게는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시녀가 있었습니다. 그 시녀의 이름은 ‘아네모네'. 그런데 플로라의 남편인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그 ‘아네모네’를 그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플로라는 아네모네를 멀리 내쫓아버립니다. 하지만 제피로스는 바람을 타고 그녀를 곧 뒤쫓아가 둘은 깊고 뜨거운 사랑을 나눕니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본 플로라는 질투에 불탄 나머지 ‘아네모네’를 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슬픔에 젖은 제피로스는 언제까지나 아네모네를 잊지 못하고 매년 봄이 오면 늘 따뜻한 바람을 보내어 ‘아네모네’를 아름답게 꽃피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바람꽃들은 ‘아네모네(Anemone)'라는 속명을 얻게된 것이죠.
또한 '아네모네(Anemone)'는 그리스어로 '바람의 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바람의 딸, 바람꽃이 피어나면 여러분을 알게 됩니다. 봄이 머지 않음을…. 비록 바람꽃이 피어난 순간에도 여전히 차가운 공기와 꽁꽁 얼어붙은 땅위에 서 있을지라도 조금만 견디어보라고 바람꽃은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조금만 견디면 긴 겨울이 지나고 생명과 희망이 가득 넘치는 봄이 반드시 올 것임을, 그 여린 몸을 피워 예고해 줍니다.
'경기 들꽃, 야생화 이야기'란 창(窓)을 처음 열면서 저는 여러분 삶 속에 '바람꽃'이 뿌리를 내리고 곱게 피워나길 소망해봅니다. 비록 몸은 여리지만 강건한 생명력으로 활력과 희망이 넘실거리는 봄을 예비해주는 바람꽃 같은 딸들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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